눈물을 마시는 새
작가 이영도
출판 황금가지
발매 2003.02.25
독특한 세계관의 매력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소설을 두번째로 읽었다.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엘프, 오크가 등장하는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이 소설은 생소하고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다.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그 누구보다 강대한 레콘, 불을 부리는 도깨비 그리고 왕을 찾는 인간, 이 4가지 선민종족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을 발한다. 이는 그저 독특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 중간 중간에 자연스럽게 그 세계관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생소한 세계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작자는 내용 전개에 맞추어 묘사나 대화로 시의적절하게 그 세계관을 풀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소설 첫부분을 읽을 때의 낯선 느낌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등장 인물들의 매력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 또한 빠트릴 수 없는 매력 요소이다. 주요 등장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케이건 드라카, 레콘 티나한, 도깨비 비형, 나가 사모 페이와 륜 페이 들의 성격과 특색은 각기 다른 종족의 차이점 만큼이나 개성이 있어서 나중에는 그저 대사 한 마디, 묘사 한 문장 만으로도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이 갈 정도다. 나는 특히 다혈질이면서도 순수한 레콘 티나한과 냉철하면서도 정이 많은 사모 페이의 성격이 맘에 들었다.
치밀한 스토리 라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스토리 라인을 빼먹는다면 섭섭할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여러 비밀들과 미쳐 몰랐던 반전이 드러나면서 손에 땀을 쥐고 책을 놓치 못하게 된다. 거대한 스케일은 장대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고 예상치 못한 반전은 치밀한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여운이 남으면서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되는 이야기의 결말은 모든 이영도 작가의 소설 가운데 가장 맘에 든다. (사실 가장 친절한 결말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 크다) 감히 이 소설을 최고의 한국적 판타지 소설 중 하나라고 말해 보고 싶다.
'다름'의 의미
'자신을 죽이는 신'은 도깨비에게 불을 선물했고, '모든이보다 낮은 여신'은 레콘에게 별철로 만든 무기를 선물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은 나가에게 신명(神名)을 선물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다가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것이 '나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간의 나늬인 데오늬 달비를 본 케이건은 나가를 멸족시키려던 분노를 잠재우고 잠적해 버린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째서 나늬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되고, 나가를 향한 케이건의 분노를 잠재울 만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일까?
'나늬'의 의미
나늬는 4가지 선민종족이 모두 절세의 미인으로 생각한다는 여인을 뜻한다. 사실 이야기 중에서는 나늬는 그저 전설속에 등장하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여인이었다. 4가지 종족의 특성만큼이나 그들의 외모와 미의 기준이 다른데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미인에 대해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의 나늬인 데오늬 달비는 외모가 아닌 '달리기'로 인간, 나가, 도깨비, 레콘 모두가 그녀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토록 다르고 서로 반목하던 4 종족이 '나늬'라는 이름을 따르게 된 것이다.
케이건의 선택
케이건이 본래부터 나가를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 그는 다른 종족과 반목하는 나가를 사랑했고 그들을 받아들임으로 의미 없는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즉, 그들의 '다름'을 포용하려 했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나가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케이건은 나가에 대한 증오만을 갖게 되었으며 나가살육자로 살아가는 동안 나가를 사랑했던 감정을 지웠다. 아니, 지워진듯 했으나 '나늬'를 본 케이건은 그것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써 나늬는 다른 종족들의 '다름'을 포용하고 그들과 함께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 속에 나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은 케이건은 -나가에 대한 증오와 사랑의 내적 갈등이었는지, 아니면 전적인 사랑에 대한 인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나가 살육을 그만두고 잠적한 것이 아닐까?
네가지 선민 종족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레콘, 도깨비, 나가는 각자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약점 또한 가진다. 강대한 힘과 결코 부러지지 않는 별철로 만든 무기를 가진 레콘은 지상에서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용맹을 자랑하지만 물을 극심하게 두려워해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정신을 통해 '니름'으로 대화를 나누며 심장을 적출한 이후에는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얻는 나가는 온도변화에 취약해 열대 기후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뤄 온도를 '보는' 나가의 천적이며 한 번죽어서도 '어르신'으로 혼이 남기에 죽음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도깨비는 정작 '피'를 두려워 하기에 분쟁을 피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는 다른 종족처럼 강력한 힘도, 이렇다할 약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물'이 있는 곳이든, 온도가 낮거나 높은 곳이든, 피가 솟구치는 분쟁의 장소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곳을 다니며 그들의 '왕'을 찾는다. 그리고 자매 중 동생인 보늬는 모든 종족에게서 태어나는 반면, 오직 인간 만이 종족 공통의 미인인 '나늬'를 갖는다.
네명의 여신들
자신을 죽이는 신, 모든이보다 낮은 여신, 발자국 없는 여신의 화신들은 서로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오직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이었던 케이건만이 그들을 느끼고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또한 '바람'을 뜻하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케이건에게 갖혀버려 동화되었을 때 이 땅의 모든 변화가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봤을 때, 작가는 결국 오직 '인간'만이 서로 다른 종족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다름'은 '틀림'이 되어버렸고 나가와 다른 세 종족은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왕'과 '왕국'을 잃었으며 결국 '변화'마저 상실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네 선민종족은 전쟁을 그치고 왕과 왕국을 되찾았으며 변화 또한 돌아오게 되었다. 오늘날 처럼 '다름'이 '틀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시대에 여러가지 생각들을 우리 '인간'들에게 던져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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