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작가 장 자크 루소
출판 산수야
발매 2003.05.20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재수학원에서 법과 사회 선생님의 잡담을 통해서 였다. 교육학 전공이었던 그 선생님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어린이들은 5살이 되기 전까지 체벌해야 한다. 5살 이전에 체벌할 경우 나중에 이를 기억하지 못해 앙심을 품지는 않지만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각인되어 부모의 말에 순종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이 꽤나 인상깊었나보다. 줄곧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기회가 없다가 우연히 분리수거 하는 중에 버려진 이 책을 발견해 집어 들고 읽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서보니 내가 책을 읽게 된 동기였던 선생님의 말은 이 책에서 보이지 않았다)
고전의 어려움과 가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 정말 재미없다. 고전이 괜히 고전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관심이 별로 없는 교육학 이야기에 루소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자연의 흐름'대로 생각을 나열하여 읽는 입장에서 명확한 논리의 흐름을 잡고 읽어나가기가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확고한 자연중심적 교육론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 읽어봐도 신선하며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런의미에서라도 역시 고전이 괜히 고전인 것이 아니다.
자연주의 교육론의 핵심
루소의 교육론은 성선설을 바탕으로 사회, 정치, 문화와 같은 인위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자연이 본래 인간에게 허락한 속성들을 최대한 발현하는 자연인(남자의 경우 에밀, 여자의 경우 소피)을 키워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루소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아이, 에밀은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나 정확한 진리만을 알고 있고 그에 못지않은 현명한 지혜를 갖추었다. 거짓말이나 아첨으로 자신을 꾸며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법은 모르지만 순수한 자신의 본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매력을 갖추었다. 단순하게 책을 읽어 얻은 지식 보다는 자신의 감각을 활용한 체험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모든 악은 약한데서부터 발생한다"
루소는 본문에서 "모든 악은 약한 데서부터 발생한다"고 말했다. 자연의 본래 성질이 아닌 "악"을 배제하기 위해 에밀은 어릴 적부터 강하게 키워진다. 에밀은 상류층 귀족이지만 어릴때 부터 방안에 틀어박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워지지 않았다. 자연에서 걷고 뛰고 만지며 때로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어둠이나 천둥에 놀라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자라난다. 때로는 위험하게 보이기도 하는 교육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최소한의 교육 방향 제시와 소극적 보호에 머문다. 아이가 다칠수도 있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루소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5살 어린 아이의 인생보다는 40살 어른의 인생이 그동안의 경험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인생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은 어린 시기에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딱 잘라서 틀렸다고 잡아떼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두려움 마저 들게 하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파격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에밀'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분서령(焚書令)과 함께 루소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져 루소는 프랑스에서 도망쳐 유랑생활을 겪어야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의 행복
그렇지만 루소의 이런 교육 방식은 그저 아이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단순하게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는 1차적인 목적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는 아이가 인생을 통해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려는 것이다. 에밀의 본문에서 루소는 말한다.
갓 태어난 어린이들 중에서 겨우 반 정도만 살아 남는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시키는 잔인한 교육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 에밀 본문 -
루소는 내일 성공하기 위해서 오늘을 투자하라는 식의 교육이 아닌, 오늘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추구했다. 오늘날에는 영아사망률이 루소의 시대처럼 높지 않다지만, 그럼에도 루소의 비판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는 교육이 만연한 곳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오늘의 행복'을 희생했던 아이들이 과연 '내일의 행복'을 찾았을까? 이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지나치게 비관주의적인 것일까? '에밀'에서 말하길 "인생을 짧다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이 짧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갈수록 그것에 비례해 인생의 고통 또한 증가하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온전하게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어린 시절에 충분한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고 했다. 비록 여기서 말하는 '지금 사람들'이 18세기 중세 유럽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21세기 한국의 교육 현실에 적합한 비판도 드물 것이다.
오늘의 에밀과 소피
18세기 유럽의 루소는 타락과 불평등이 넘치는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의 정신을 개혁해야 한다 보고 그 개혁 방법을 '에밀'을 통해 설명했다. 이 책은 편의상 루소가 '에밀'을 어린 시절부터 '소피'와 결혼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형식을 사용했지만, 실제 '에밀'이나 '소피'와 같은 이상 적인 자연인은 말그대로 이상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루소의 시대보다 세월이 흘러 루소가 꿈꾸었던 '민주주의'가 실현된 현대에는 '에밀'과 '소피'가 키워질 수 있을까? 어쩌면 인류가 날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는 허울좋은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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